20세기 분석철학의 업적중의 하나는 분명 논리학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양상논리학의 발전은 가능, 필연, 우연을 막연한 방식이 아닌 하나의 체계로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큰 이점이 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사실 우리 삶과 밀접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접근하기 어렵다는 데 큰 단점이 있다. 수학이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발전을 주어왔지만, 실재로 수학을 이해하고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리학을 몰라도, 미적분을 몰라도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고 싶어하는 존재이다. 그럴때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 개론서이다. 서점에 가보면 적어도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개론서, 대중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을 발판 삼아서 우리는 우리세계가 돌아가는 구조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다. 그렇다면 논리학은 어떠한가? 우선 학교에서 조차 배우지 않는다. 따라서 들은 풍월도 없다. 게다가 술어논리, 양상논리라면은 전공자 아니면 접근하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 책이 반가웠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는데 있다. 여전히 어렵지만, 양상논리 그 맛을 느끼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그랬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우리는 하루에 이런 얘기를 얼마나 하는가? 특히 고백하지 못한 이성에 대한 아쉬움, 떠나간 이성에 대한 아쉬움이 대부분일 것이다.(인생은 사랑인가?ㅋ)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후회, 그리움을 담아서 말이다. 기존의 논리학이 차가웠다면 양상논리는 분명 기존 논리학이 놓쳤던 우리의 생각의 부분을 명료하게 기술할 수 있다. (물론 명료함이 어떤 기준을 가져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명료하지 않다.) 그런데 여전히 논리학은 논리학이다. 어렵다. 낯설다. 수학 알레르기 있는 사람에게는 쳐다보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름의 정합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있지 않은가? 논리와 이성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어떤 공통의 기반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은 가능, 필연, 우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사고를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가능 세계들에 대한 사유를 펼쳐가고 있다. 우리와 시공간으로 단절되어 있는 또다른 세계? 이 얼마나 멋진 사유인가? 차가운 논리학으로 만들어 내는 판타지 아닌가? 이 아이러니는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이 책의 저자의 전공이 예술철학과 논리학이라는 아이러니한 사실도 분명 하나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 본다. 거의 전형이 사라진 멋대로하기로 보이는 현대예술과, 차갑고 보편적인 논리학이 공존하는 저자라니..이런 책이 가능했을 기반이리라.


  이 책의 단점이랄까? 현대 영미분석철학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긍정을 저자는 공공연히 표명하고 있다. 머릿말에서 몇 구절 인용해보자. 


  "이과, 수학계뿐만 아니라 문학, 윤리학, 심리학, 고대 그리스 철학 연구, 종교학 등에서도 가능세계는 조금씩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철학의 역할이 여러 학문의 기초라고 한다면, 이렇게 학제적인 응용을 잉태한 분석철학이야말로 가장 철학다운 철학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수학이 싫어서 분석철학도, 가능세계론도 경원시하겠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분석철학은 사상의 순수문학, 클래식 음악과 같은 것입니다. 철학사를 철저히 경시하고 있음에도 실은 소크라테스 이래의 '개념분석', '언어 분석'의 사고법을 그대로 계승한 가장 논쟁적이고 공정한 정통파 스타일의 철학이 분석철학인 것입니다. 간편한 뉴에이지 사상이나 통속적 철학으로 유희함으로써 문학적 공상이나 종교적 법열로 일거에 비약하려 하기보다 한 단계씩 나아가는 수수하고 착실한 논증을 축적해 가는 방식이 그런 초월적 경지로 깊게 들어갈 수 있는 경우도 있다는 진실을 독자들이 깨닫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머릿말은 철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원초적인 논쟁으로 이끈다. 따라서 나는 대답할 수 없지만, 그의 전제내에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일본인 저자의 책이라는 배아픔(?)을 제외한다면 나는 지인들에게 일독을 권할 것이다. 




Posted by elenc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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