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래, 다 좋은 말이다. 가슴이 뛴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빠졌다.


  '공부를 왜하지?' 


  강연자를 선해한다면, 이 질문은 중요하고 핵심적이라는 것을 강성태 본인도 알고 있지만, 이 대답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기에 다루지 못한 것이 아닐까? (어딘가에서 다루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찾아보기는 귀찮다).


  아니라면, 즉, 이 질문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서점에 펼쳐진 자기계발서들의 공허한 희망참일 뿐이다. 우리가 공부에 적합하게 태어나지 않은 이상, 의지를 발휘해야할 때는 어떤 이유, 명분이 있어야한다. 그것이 힘든 길을 견디는 등불이 될테니까.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왜 해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도 전에 '습관'을 만들어버리는게 더 나아서, '학창시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묻기도 전에 '그냥' 하는 것이 때로는 나을테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 답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공부가 부와 명예와 권력의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 다 알고 있는 답이라서 할 필요도 없었나보다. 소위 사람 구실하기 위한 적당한 공부라는 것이 있었다면, 아마 저런 강연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강연자는 자기계발의 기쁨을 알려주려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강연에 많은 청중들이 모일 수 있는 것은 부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나 부와 명예와 권력은 상대적인 것이다.  소수가 독점해야 부와 명예와 권력이다. 다같이 부자, 권력자, 명예는 없다. (다같이 잘 살고, 명예로운 것을 바랐다면, 그리스시대나 가능할까? 노예는 차치하더라도) 그래서 현실은 결국 정규분포이고, 상위 몇 퍼센트가 늘 독점하게된다. 모르겠다, 현재 우리사회는 죽느냐 사느냐로 찌그러진 곡선이라 정규분포가 안될지도.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에 대해 듣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강연자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있는 청자의 무리가 있을뿐.


  처음 질문이 잘못된거 같다. 공부가 학창시절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텐데. 공부가 무엇을 알아가는 활동이라면, '왜'라는 질문은 없을 것이다. 활동이 곧 이유가 될테니. 이미 왜를 묻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활동이리라. 하고싶지 않은 활동을 묻지도 않아야되고, 또는 묻지도 않는 활동으로 만들어야 되는(습관) 그 이유를 묻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새삼 모두가 알고 있겠구나 싶다. 


  서점에 펼쳐진 자기계발서들의 성공담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내일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게 나일지 그 누구일지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일뿐. 가장 성공한 자기계발서는 나도 저대로만 하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책 아닌가? 안되면 실패의 문제를 스스로에게 돌리도록 만드는 책. 21세기의 신과 같다. 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해서 벌을 받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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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lenc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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