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유발 하라리
![]() | 호모 데우스 - ![]()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김영사 |
인간이란 종에 대한 미래에 대해 그려본 책. 꽤 길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여 쉬엄쉬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인간을 지능과 의식으로 결합된 유기체로 정의한다. 인간만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의식이 인간을 우주에서 특별하게 만든다는 믿음을 깨부순다. 마치 물리주의처럼. 의식이 왜 있는지는 해명되지 않지만, 물리현상이 우선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자유로운 판단을 한다고 의식하기 전에, 이미 뇌의 특정부분은 활성화된다. 이럴 경우 의식의 지위는 상당히 의심스러우면, 오히려 인간에게 거추장스러운 부분이된다.
인간의 지능 또한 비유기체 알고리즘(컴퓨터)에 비할바가 아니다. 이미 컴퓨터의 연산은 인간의 지능을 능가했고, 더욱 능가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특징이라고 정의된 의식과 지능에서 인간은 더이상 특별하지 않다. 미래에 인간이란 집단으로서의 의미는 유지할지 모르겠지만, 개인으로서 인간의 의미는 거의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것이 하라리가 쓴 미래에 대한 묵시록이다.
그러나 책 후반부부터 조금 아쉬웠던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대목이, 하라리의 말처럼 우리가 미래에 대해 알수록 미래는 바뀐다는 것과 충돌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올림픽대로가 막힌다는 사실을 알게 될수록 올림픽대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결국 올림픽대로는 막히지 않는 역설. 첫번째 앎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미래가 바뀐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개인적으로 내일의 일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앎은 언제나 현시점의 문제이고, 미래는 언제나 미래의 문제니까.
여튼, 앎의 문제란 무엇인가? 앎은 이미 자유가 아닐까?
눈앞에 뱀이 있다. 피해야지. 이것을 알고리즘이라고 하면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의 문제를 인간에게서 제외할 수 있다. 그러나 뱀과 양 사이에서 내가 뱀에게 다가간다면? 전염된 테란일까? 자살만이 자유의지를 증명할 유일한 방법일까? 자살의 선택또한 자기파괴알고리즘의 작동일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내가 불편한것은 하라리가 비인간주의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물론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더 이상 앎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앎은 결국 의미에 기반하고, 인간에게 의미는 계속 발생할 테니까. 그 의미가 물리적인 것에 기반해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발생된 의미의 문제는 어쩔 수 없다. '인간'의 의미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무의미로 가득찼다면, 그는 비어있음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채워야할 의미로서의 무의미. 모든 것이 단지 우주의 물리적 흐름이라면, 비의미라 해야하지 않을까? 의미와 무관한 세계 말이다. 다른 동물이 의미라는 걸 가질지, 갖게되면 어떤 모습일지, 우리 인간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고, 사실 관심도 없을 것이다. 만약 동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탐구한다면 그것은 동물의 의미라고 인간에게 해석된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의미의 보증자인 신이 죽고, 영혼이 사라진다고 해도, 보증되지 않은 것으로서 의미로서 의미는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 괴롭힘의 어떤 선에서 무의미를 견딜 것인지는, 견뎌질 것인지, 만족할 것이지는, 결국 자신의 심리적 현실을 따를 것이다.